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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기독교 유교 불교와 한민족역사 왜곡의 실상(유교)

유교와 한민족역사

 

유교 불교 기독교의 한민족사 왜곡

 

"조선 사람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한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왜래종교,왜래사상에 물들어 우리 역사와 문화를 다 잃어버린

한민족을 향해 이렇게 통탄하였다. 한마디로 우리가 주인이 되어 역사와 문화를 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외래문화와 외래사상을 더 신봉한 나머지 역사마저도 '남의 눈"으로 보려 한다는

탄식이다. 특히 중국의 정치적 그을 아래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고려 말과 조선조의

집권층은 역사 해석에 있어서도 중화주의 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사실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다시피 했다. 원의 결혼정략으로

고려가 부마국, 곧 사위의 나라가 된 것이다. 충렬왕이 원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것을 비롯해

나중에 공민왕 때까지 역대 왕들이 원 황실의 여자와 결혼해야 했다. 이를 통해 고려 왕실을

감시하면서 그 정황을 원에 보고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한 것이다.

그 바람에 한 때 고려에는 '왕이 둘'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또 장차 고려의 왕이 될

세자는 반드시 원의 수도인 북경에 인질처럼 머물다가 귀국해서 왕위에 오르는 관례도 생겨났다.

 

나아가 고려의 왕은 중국의 천자에 견주던 기존 칭호들을 모두 한 단계 낮춰 제후의 호칭으로 바꿔

쓰게 되었다. 태조 태종 등과 같이 이전까지의 왕의 묘호에 붙이던 조祖나 종宗 대신 왕자를 붙였다.

 또 묘호 앞에 (원에 충성한다는) 충자를 붙이게 했다. 충렬왕이니 하는 호칭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또 왕이 자신을 가리키던 호칭인 짐을 고로, 태자를 세자로, 왕이 내리던 칙령인 선지는

왕지로 바뀌었다.

 

이런 분위기에 맞추려 한 듯, 고려 말 유학자들은 중국이라면 껌벅 죽으며 사대주의 사관을 견지했다.

당장 한민족의 역사가 기자조선에서 시작됐다는 중국의 기록과 주장을 신봉했다. 나아가 우리의

상고사가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중국식 역사관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부식이다.

 

그는 삼국사기를 쓰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의 역사마저 싹 빼버렸다. 우리 민족의

엘리트요 지배층이란 사람이 먼저 이런 행태를 보였으니, 오늘날 중국이 '발해는 중국사' 라고

마음 놓고 우겨대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사대주의 사관에 찌들었던 김부식은 한마디로

이미 고려 때 우리 한국사의 커다란 줄기를 꺽어버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사대주의 사관으로 쓰인 그의 삼국사기가 오늘날까지도 가장

중요한 사서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때도 역시, 우리 한민족의 시각이 아니라 공자 혹은 주자의

눈으로 역사를 보았다. 그 결과 한민족의 고유 사서들은 이단이라 하여 압수,소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한 예로 태종은 서운관에 보관되어 있던 우리 사서들의 내용이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하여 불태웠다.

이러다 보니 우리 사학자들이 뒤늦게 민족사를 바로 세우려 해도 그것을 뒷받침할 사료를 차지 못하게 됐다.

결국 한민족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어이없게도 중국,일본에 의해 왜곡된 사료들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최고 통치자인 임금들이 이러다 보니 그 밑의 집권층,사대부 유학자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유학자들 면면을 일일이들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중국을 따르고 받드는 사대주의 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홀대했다. 심지어 오늘까지 우리 한국인이 숭앙하는 이율곡이며 정약용 등 대학자들마저도

명나라 황제와 황실, 그들의 역사기록을 존대하고 우리 역사는 경시했다. 이념과 학문으로서의 유학,

나아가 그것이 생활문화로 굳어진 유교를 숭앙하는 엄격한 분위기 속에 우리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자리 잡을 틈바구니조차 없었던 것이다.

 

 

 

위 글의 내용은 상생출판사에서 발행한 소책자로

잃어버린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