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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사라져버린 우리나라 고조선의 역사

사라져버린 우리나라 고조선의 역사

그원인과 문제점 그리고 그 대안은....

 

인터넷에 우리나라 고조선 관련 역사를 검색하다보면

등장하는 용어가 있는데요...바로 환빠입니다

 

잃어버린 우리 고대역사를 찾자고 주장하는 나도 환빠로 분류되겠습니다. -_-;;

슬픈현실입니다. 뭔지도 모르고 부화뇌동하는 분도 있고요

나름 역사적인 학식과 소양이 있다고 자부하면서 환빠라고 비웃는 분도 있고요

 

오늘날 현실이 이렇게 참담하게 되기까지 과정...

그 역사를 한번 알아봤어요.

 

 

 

우리나라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거로 나옵니다.

그러면 그 이후로 고조선의 역사과정이 차례대로 나와야 정상이것만

그 이후 단 한줄도 역사기록이 없어요. 언제 건국했다만 나오고 그 이후 역사는 없는겁니다.

사실상 우리의 고조선 역사는 없어진거나 다름없답니다.

역사속에는 그 나라의 문화와 정신이 담겨져 있는데

역사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바로 문화와 정신도 같이 실종된거나 마찬가지랍니다.

 

당시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나 문화수준을 알수없게 되버린 것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와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 무덤파헤쳐서 유골단지나 쇠조각 장신구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죠

 

 

  자주적 역사서는 수천 년 동안의 무수한 전란 속에서 화재로 소실되거나

외적에게 탈취되었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정책적으로 나라에서 대거 수거해서

소각령을 내리고는 했는데요.  특히 고려때부터 유교가 들어오면서 국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유가와 불가 사상에 벗어난 사서들이 대거 소각되었습니다.

 

 특히 고려 중기 김부식의 대대적인 사료 수거와 소각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민족사의 허리가 잘려나간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을

 만큼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조에 와서는 더욱 심각하게 사서 소멸은 중앙 조정에 의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백 년 전, 조선 초기만 해도『삼성기』를 비롯한 10여 종에 달하는 한민족의

 도가사서들이 민간에 널리 실재하고 있었습니다.

 

 

 

세조 3년 5월 26일

팔도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주남일사기>,<지공기>,<표훈삼성밀기>,<안함노원동중삼성기>,<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 문태산 왕거인 설업등<삼인기록>,<수찬기소>의 1백여권과<동천록>,<마슬록>,<통천록>,<호중록>,<지화록>,<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 민간 및 사사에 널리 효유하라"하였다.

 

 

 

예종1년 9월

예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증기>, <지이성모하사량훈>, 문태, 옥거인, 설업 세사람의 기 백여권과 <호중록>, <지화록>, <명경수>

 

모든 천문, 지리, 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에 바치고,

외방에서는 가까운 도는 11워 그믐날까지, 먼도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자는 2품계를 높여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천구에게는 면포 50필을 상주며,

 숨기고 바치치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하고,

 숨긴자는 참형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에 속히 유시하라."하였다.

 

 

 

성종 원년 12년 9일

여러 도의 관찰상게 교서를 내리기를

 

<주남일사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증기>, <지이성모>, <하소량훈>, 문태, 옥거인, 설업 <삼인기> 1백여권과 호중록>, <지화록>, <명경수>무릇 천문, 지리, 음양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했으니 상항 <명경수>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 ,<도선참기>는 전일의 하유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성리학에 반하는 자주적 민족사서 수거는

조선조에 걸쳐 지속성을 가지고 행했던

원칙적이고 장기적으로 행한 국가 정책이었습니다.

 

조선조는 공자와 주자의 유교를 벗어나는 이념은 생각할수도 없고

용납될수도 없는 사회였고. 중국의 최고로 받드는 중화사상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거나 깍아내리는 일은 일체 용납이 안되던 시절 


 

 당연히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한 역사 사료는 

 자료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서수거령 이후에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대 전란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우리 사서가 탈취, 소실되었습니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제가 행한 조선사 말살작전으로

총 51종 20여만 권의 서적이 소각 또는 인멸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자주적인 역사서들이 모두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민족혼을 되살려주는

환단고기 소중하게 간직합시다